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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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대 사학과 시절 (1946-1969)

  국사학과는 1969년 3월 문리과대학 사학과가 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3개 학과로 분리되면서 탄생했다. 원래 문리과대학 사학과는 일제시대 종로구 동숭동(현 대학로)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소속의 사학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후 미군정시대에 경성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에는 경성대학과 여러 전문대학을 합쳐 12개의 단과대학을 아우르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립된 것이다. 이때 사학과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었으며,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한국인 학자들이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각 전공별로 합동 연구실을 가지고 대학원 과정도 서로 독립되어 있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에서 한국사강의를 담당한 분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사학 및 사회학과 출신으로서 일제시대부터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이끌어오던 국사학계의 거두인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교수와 역시 와세다대학 사학과 출신의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교수였다. 이병도 교수는 한국고대사와 고려시대 사상사(풍수도참사상) 및 조선시대 유학사 연구의 대가였고, 김상기 교수는 원래 동학과 동학운동, 한중관계사를 전공했으나 실제 강의는 중국사를 가르쳤다.

  이어서 1946년 서울대학교가 창립된 이후에는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 출신의 남창(南滄) 손진태(孫晉泰) 교수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의 유홍렬(柳洪烈) 교수와 이인영(李仁榮) 교수, 김성칠(金聖七) 교수, 그리고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 출신의 강대량(姜大良, 뒤에 姜晉哲로 개명) 교수 등 젊은 학자들이 차례로 취임하여 교수진용이 보강되었다. 유홍렬 교수는 조선시대 書院과 천주교, 김성칠 교수는 조선시대 연행사, 이인영 교수는 조선 초기 만주관계사, 강대량 교수는 고려시대를 전공하여 어느 정도 각 시대를 포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학과의 학풍과 교수진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직후 新民族主義史學을 창도하면서 좌우대립을 지양하려 했던 손진태 교수와 이인영 교수는 전란 중 북으로 피랍되어 곧 세상을 떠났고, 강대량 교수는 학교를 그만두었으며, 김성칠 교수는 1951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등 큰 파동을 겪었다. 김성칠 교수는 한국전쟁 중 서울에 남아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역사 앞에서》(1993)이다. 강대량[강진철] 교수는 그 뒤 고려대학에 다시 취직하여 학문활동을 계속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에는 이병도 유홍렬 두 교수가 외롭게 국사학을 이끌어갔다. 전쟁 후에 불어닥친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민족주의적 학풍이나 마르크스주의적 학풍은 사라지고, 엄밀한 아카데미즘이 학계를 지배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경험하고 난 1960년대에 들어와 사학과에는 한 차례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국사학계의 원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병도 교수가 1961년 정년을 맞이하여 학교를 떠나고, 유홍렬 교수도 1966년 정년퇴임했다. 그 자리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1회 졸업생인 한우근(韓㳓劤) 교수가 1959년에 취임하여 한국근대사를, 3회 졸업생인 김철준(金哲埈) 교수가 1963년에 취임하여 한국고대사를 각각 강의하였다. 이어서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서 사범대학 교수를 지내던 김용섭(金容燮) 교수가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조선후기사를 강의했다. 1967년에는 한영우(韓永愚)가 전임조교로 취임하여 한국중세사 강의를 맡았다.

 

문리대 국사학과 시절 (1969-1975)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교수진이 개편된 1960년대에는 학풍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이후 불어닥친 민족주의 열풍의 여파로 일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과 병행하여 한국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간 한국의 역사학 전공자들은 1952년 부산 피난시절에 역사학회를 창립하여 역사학보란 기관지를 간행하여 역사학 발전을 위한 의욕을 높였다. 역사학 전문 학회로는 최초였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한국사 전공자은 한국사 전문 학회의 창립 필요성을 느껴, 1968년에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가 발족하였는데,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수들도 이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사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에 국사학과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사학과 체제 속에서는 필요한 교수인력과 학생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추세에서 1960년대 초부터 추진되어 오던 국사학과 독립 청원이 문교부의 승인을 얻어 1969년 새 학기부터 사학과가 해체되고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그리고 서양사학과가 독립된 학과로 발족하였다.

  국사학과가 신설되던 해에 한국학 연구기관인 한국문화연구소(韓國文化硏究所)가 문리대 부설기관으로 설치된 것도 국사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연구소의 초대소장은 이 연구소의 산파역을 담당한 한우근 교수가 맡았으며, 문교부의 지원을 받아〈한국문화연구총서〉가 1970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다. 한우근의《개항기 상업구조의 변천》(1970), 김용섭의《조선후기 농학의 발달》(1970), 한영우의《정도전 사상의 연구》(1973), 송찬식의《이조 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1973) 등이 이 총서의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이 총서들은 이른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새로운 연구성과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사학과가 독립된 1970년대에는 국사학의 연구와 교육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전임조교로 있던 한영우가 전임강사로 승진하여 교수진은 4명으로 늘어났다. 한우근 교수가 근대사를, 김철준 교수가 고대사를, 김용섭 교수가 조선시대사를, 한영우 교수가 여말선초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사를 각각 맡았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사관을 비판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당시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다.

  국사학과의 학생 수도 늘어났다. 국사학과의 모집 인원은 15명, 동양사와 서양사는 각각 10명으로 되어, 종전에 25명을 모집하던 사학과의 정원보다 10명이 늘어난 것이다. 국사학과 대학원 모집인원도 늘어나 석 박사과정 운영이 궤도를 잡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국사학과의 전문 학술지인 《한국사론》(韓國史論)을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국사학과 독립이 가져온 중요한 결실의 하나였다.

 

인문대학 국사학과 시절 (1) --1975-1980년대--

  국사학과가 독립된 지 6년만인 1975년에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해체되고 인문대학이 새롭게 탄생했다. 이해 캠퍼스도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이전했다. 국사학과는 人文大學에 소속되었다. 이같은 학제 개편과 캠퍼스 이전 과정에 “종합화” 차원에서 교수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김용섭 교수는 연세대로 이적하고(1975. 3), 사범대학에서 고려시대를 강의하던 변태섭(邊太燮) 교수가 국사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사범대학의 이원순(李元淳) 교수도 한때 본과 교수로 합류하였으나 곧 사범대학으로 되돌아갔다.

  관악캠퍼스 시대의 또 하나의 큰 변화는 1976년부터 교양 한국사과목이 선택에서 필수로 바뀐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의 주체성 강화 교육과 관련된 조치였다. 교양 한국사가 필수화됨에 따라 각 대학에서의 한국사 담당 강사의 수요가 높아졌다. 이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의 정원수도 급격히 늘어나 전공과목 개설의 수가 많아지면서 교수 인력의 증원도 불가피 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1976년부터 교수 공채제도가 새로 도입된 가운데 7차에 걸쳐 9명의 교수가 차례로 임용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대학을 졸업한 학자들이었다. 1977년에 이태진(李泰鎭; 61학번; 한국사회사) 교수가 첫 번째 공채로 임명된 데 이어, 1979년에 최병헌(崔柄憲; 63학번; 한국불교사) 교수, 1981년에 정옥자(鄭玉子; 61학번; 한국근세사) 교수, 노태돈(盧泰敦; 67학번; 한국고대사) 교수, 권태억(權泰檍; 70학번; 한국근대사) 교수, 1982년에 최승희(崔承熙; 59학번; 한국근세사) 교수, 그리고 1986년에 김인걸(金仁杰; 71학번; 한국근세사) 교수, 1988년에 송기호(宋基豪; 75학번; 한국고대사) 교수, 1990년에 노명호(盧明鎬; 71학번, 한국중세사) 교수가 차례로 임용되었다. 이로써 국사학과의 규모는 크게 확대되고, 전공분야도 다양해졌다.

  새로운 교수인력이 대거 충원되는 동안 1981년 이후 세 분의 원로교수들이 학과를 떠났다. 23년간 봉직하면서 학과와 연구소를 이끌어오고, 조선시대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한 한우근 교수가 1981년 2월 정년퇴직하여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뒤이어 1988년 8월에는 한국 고대사의 권위자이던 김철준 교수도 26년간 봉직했던 본교를 떠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다가 아깝게도 다음해 1월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고려시대 연구의 권위자였던 변태섭 교수는 1990년 8월 15년간 봉직했던 본과를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75년 이후의 관악캠퍼스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유신체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고, 1981년부터는 이른바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학부 입학정원이 15명에서 50여 명(졸업정원 40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 1985년 이후에는 졸업정원제가 폐지되고 입학정원이 3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문대학 국사학과 시절 (2) --1990년대 이후--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일부 젊은 국사학도들 사이에 민중사학을 제창하는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었다. 1950년대의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학회가 력사학회요, 1960-1970년대의 신민족주의적 학풍을 대변하는 학풍이 한국사연구회로 나타났다.
면, 1980년대의 민중사학을 반영하는 학문활동은 한국력사연구회의 발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큰 시야에서 볼 때 국사학과의 학풍은 견실한 아카데미즘의 기초 위에서 민족과 민중을 함께 포용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로는 이념적 성향이 크게 후퇴하고 생활사, 지방사, 현대사 그리고 문화사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부속되어 있던 奎章閣이 1990년대 초에 독립기구로 승격하고, 그 기능이 활성화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동안 규장각 도서의 이용도가 가장 높은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연대기 자료였으며, 연구주제도 사회경제사가 주류를 이루어왔으나, 최근에는 의궤류와 지도류 등의 시각자료와 문집류 등의 간행이 활발해지면서 이를 이용한 조선시대 문화사와 사상사, 그리고 생활사의 연구가 점차로 활성화되는 추세에 있다.

  한편, 1980년대 말 이후로 인문대학 부속기관이던 한국문화연구소가 본부 직할의 법정연구소로 승격되고 교육부로부터 매년 1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아 10개년 계획의 ‘규장각자료를 이용한 연구사업’이 추진된 것은 국사학 발전을 크게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구성과는 매년 연구소에서 간행하는《한국문화》에 게재되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89년 이후로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 강의가 개설되고, 이에 따라 대학원에서 현대사를 주제로 한 박사 혹은 석사 학위의 논문이 다수 배출되고 있으며, 이 방면의 연구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2001년부터 대학입학제도가 크게 바뀌어 학과별 신입생 모집이 폐지되고 인문대학은 역사․철학 계열 7개 학과 신입생을 통합 모집했다. 그리고 2002, 2003학년도에는 인문대 전체 15개 학과 신입생을 통합 모집하였고, 2004학년도부터는 인문계열2(역사․철학계열)로 통합 모집하였다. 그 결과 국사학과는 3․4학년 이상의 학생만을 지도하여, 학과 운영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 2008학번부터는 2학년 전공 진입이 가능하여, 2009학년도부터는 국사학과에 2․3․4학년 이상의 학생들이 재학하였다. 인문대학 입학제도가 2013년 다시 변화하여, 신입생 중 일부는 전공예약 형태로, 나머지 일부는 기존과 같이 인문계열로 통합 모집하였다. 이에 따라 2013학년도부터는 다시 국사학과에 10∼13명의 1학년 신입생이 입학하게 되었으며, 인문계열로 통합 모집한 학생들도 2학년부터 전공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02년 최승희 교수, 2003년 한영우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2003년 이상찬(李相燦; 74학번; 한국근대사) 교수, 정용욱(鄭容郁; 79학번; 한국현대사) 교수, 2005년 문중양(文重亮; 81학번; 과학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또한 2007년 정옥자 교수, 2008년 최병헌 교수, 2009년 이태진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2009년 남동신(南東信; 80학번; 한국불교사) 교수, Milan Hejtmanek(한국근세사) 교수, 오수창(吳洙彰; 78학번; 조선정치사) 교수, 김건태(金建泰; 84학번; 조선농업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이어 2014년 노태돈 교수, 2015년 권태억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권오영(權五榮; 80학번; 한국고대사) 교수, 허수(許洙; 84학번; 한국근대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2017년에는 노명호 교수, 김인걸 교수, Milan Hejtmanek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2018년에 김경숙(金景淑; 84학번; 한국근세사) 교수, John P. DiMoia(의학사) 교수, 정요근(鄭枖根; 90학번; 한국중세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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