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리대 사학과 시절 (1946-1969)
문리과대학 사학과는 1946년에 경성대학과 여러 전문대학을 합쳐 12개의 단과대학을 아우르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문리과대학 사학과에는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한국인 학자들이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각 전공별로 합동 연구실을 가지고 대학원 과정도 서로 독립되어 있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에서 한국사 강의를 담당한 분은 일제 강점기부터 진단학회를 이끌어오던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교수와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교수였다. 이병도 교수는 한국고대사와 고려시대 사상사(풍수도참사상) 및 조선시대 유학사 연구를 전공하였고, 김상기 교수는 원래 동학과 동학운동, 한중관계사를 전공했으며 실제 강의는 중국사를 담당하였다.
이어서 1946년 본격적으로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립된 이후에는 남창(南滄) 손진태(孫晉泰) 교수와 유홍렬(柳洪烈) 교수, 이인영(李仁榮) 교수, 김성칠(金聖七) 교수, 그리고 강대량(姜大良, 뒤에 姜晉哲로 개명) 교수 등 젊은 학자들이 차례로 취임하여 교수진용이 크게 보강되었다. 유홍렬 교수는 조선시대 서원과 천주교, 김성칠 교수는 조선시대 연행사, 이인영 교수는 조선 초기 만주관계사, 강대량 교수는 고려시대를 전공하여 어느 정도 각 시대를 포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학과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 직후 신민족주의사학을 주도하면서 좌우 대립을 극복하려 했던 손진태 교수와 이인영 교수는 전란 중 북으로 피랍된 후 세상을 떠났고, 강대량 교수는 학교를 그만두었으며, 김성칠 교수는 1951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김성칠 교수는 한국전쟁 중 서울에 남아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한《역사 앞에서》(1993)이다. 강대량[강진철] 교수는 그 뒤 고려대학교에 다시 취직하여 학문과 교육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에는 이병도‧유홍렬 두 교수가 외롭게 국사학을 이끌어갔다. 전쟁 후에 불어닥친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민족주의적 학풍이나 마르크스주의적 학풍은 사라지고, 엄밀한 실증주의 아카데미즘이 학계를 지배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경험한 이후 1960년대에 사학과에는 한 차례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국사학계의 원로였던 이병도 교수가 1961년 정년을 맞이하여 학교를 떠나고, 유홍렬 교수도 1966년 정년퇴임했다. 그 자리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1회 졸업생인 한우근(韓㳓劤) 교수가 1959년에 취임하여 한국근대사를, 3회 졸업생인 김철준(金哲埈) 교수가 1963년에 취임하여 한국고대사를 강의하였다.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지내던 김용섭(金容燮) 교수가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조선후기사를 강의했다. 1967년에는 한영우(韓永愚)가 전임조교로 취임하여 한국중세사 강의를 맡았다.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교수진이 개편된 1960년대에는 학풍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19혁명과 이후 불어닥친 민족주의 열풍의 여파로 일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과 병행하여 한국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간 역사학 전공자들은 1952년 부산 피난시절에 역사학회를 창립하여 역사학보란 기관지를 간행하여 역사학 발전을 위한 의욕을 높였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한국사 전공자들은 한국사 전문 학회의 창립 필요성을 느껴, 1968년에 한국사연구회가 발족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국사학 교수들도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2) 문리대 국사학과 시절 (1969-1975)
국사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에 국사학과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사학과 체제 속에서는 필요한 교수 인력과 학생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1960년대 초반부터 추진되어 오던 국사학과 독립 청원이 문교부의 승인을 얻어 1969년 새 학기부터 사학과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각각 독립된 학과로 발족하였다.
국사학과가 신설되던 해에 한국학 연구기관인 한국문화연구소가 문리대 부설기관으로 설치된 것도 국사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초대 소장은 이 연구소의 산파역을 담당한 한우근 교수가 맡았으며, 문교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문화연구총서”가 1970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다.
한우근의《개항기 상업구조의 변천》(1970), 김용섭의《조선후기 농학의 발달》(1970), 한영우의《정도전 사상의 연구》(1973), 송찬식의《이조 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1973) 등이 이 총서의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이 총서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새로운 연구성과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국사학 연구와 교육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전임조교로 있던 한영우가 전임강사로 승진하여 교수진은 4명으로 늘어났다. 한우근 교수가 근대사를, 김철준 교수가 고대사를, 김용섭 교수가 조선시대사를, 한영우 교수가 여말선초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사를 각각 맡았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이 당시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다.
국사학과의 학생 수도 늘어났다. 국사학과의 모집 인원은 15명, 동양사와 서양사는 각각 10명으로 되어, 종전에 25명을 모집하던 사학과의 정원보다 10명이 늘어난 것이다. 국사학과 대학원 모집 인원도 늘어나 석‧박사과정 운영이 비로소 궤도를 잡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국사학과의 전문 학술지인《한국사론》을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국사학과 독립이 가져온 중요한 결실의 하나였다.
3) 인문대학 국사학과 시절 (1)
―1975-1980년대―
국사학과가 독립된 지 6년이 지난 1975년에는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해체되고 새롭게 인문대학이 탄생했다. 이해에 캠퍼스도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이전하였고 국사학과는 인문대학에 소속되었다. 학제 개편과 캠퍼스 이전 등 “종합화” 과정에서 교수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김용섭 교수가 연세대로 이적하고, 사범대학에서 고려시대를 강의하던 변태섭(邊太燮) 교수가 국사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사범대학의 이원순(李元淳) 교수도 한때 본과 교수로 합류하였으나 곧 사범대학으로 되돌아갔다.
관악캠퍼스 시대 또 하나의 큰 변화는 1976년부터 교양 한국사과목이 선택에서 필수로 바뀐 것이다. 교양 한국사가 필수화됨에 따라 각 대학에서의 한국사 담당 강사의 수요가 높아졌다. 이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의 정원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전공과목 개설의 수가 많아지면서 교수 인력의 증원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1976년부터 교수 공채제도가 새로 도입된 가운데 7차에 걸쳐 9명의 교수가 차례로 임용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대학을 졸업한 학자들이었다. 1977년에 이태진(李泰鎭; 한국사회사) 교수가 첫 번째 공채로 임명된 데 이어, 1979년에 최병헌(崔柄憲; 한국불교사) 교수, 1981년에 정옥자(鄭玉子; 한국근세사) 교수, 노태돈(盧泰敦; 한국고대사) 교수, 권태억(權泰檍; 한국근대사) 교수, 1982년에 최승희(崔承熙; 한국근세사) 교수, 그리고 1986년에 김인걸(金仁杰; 한국근세사) 교수, 1988년에 송기호(宋基豪; 한국고대사) 교수, 1990년에 노명호(盧明鎬; 한국중세사) 교수가 차례로 임용되었다. 국사학과의 규모는 크게 확대되었고, 전공 분야도 다양해졌다.
한편 새로운 교수 인력이 대거 충원되는 동안 세 분의 원로교수가 학과를 떠났다. 23년간 봉직하면서 학과와 연구소를 이끌어 오고, 조선시대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한 한우근 교수가 1981년 2월 정년퇴직하여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뒤이어 1988년 8월에는 한국 고대사의 권위자이던 김철준 교수도 26년간 봉직했던 본교를 떠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였다. 고려시대 연구의 권위자였던 변태섭 교수는 1990년 8월 15년간 봉직했던 본과를 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75년 이후의 관악캠퍼스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유신체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고, 1981년부터는 이른바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학부 입학정원이 15명에서 50여 명(졸업정원 40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다. 1985년 이후에는 졸업정원제가 폐지되고 입학정원이 30여 명으로 줄어드는 등 학사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4) 인문대학 국사학과 시절 (2)
―1990년대-2022―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소장 국사학도들 사이에서 민중사학의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의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학회가 역사학회이고, 1960-1970년대의 신민족주의적 학풍을 대변하는 학풍이 한국사연구회였다면, 1980년대의 새로운 학문 활동은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역사 단체의 발족으로 나타났다. 거시적 시각에서 국사학과의 학풍은 견실한 아카데미즘의 기초 위에서 민족과 민중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로는 이념적 지향이 후퇴하고 생활사, 지방사, 문화사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분야에도 연구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부속되어 있던 규장각(奎章閣)이 1990년대 초에 독립기구로 승격하고, 그 기능이 활성화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동안 규장각 도서의 이용도가 가장 높은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연대기 자료였으며, 연구주제는 사회경제사가 주류를 이루어왔으나, 최근에는 의궤류와 지도류 등의 시각자료와 문집류의 간행이 활발해지고, 이를 이용한 조선시대 문화사와 사상사, 그리고 생활사 연구가 점차 활성화되는 추세에 있다.
한편, 1980년대 말 이후 인문대학 부속기관이던 한국문화연구소가 본부 직할의 법정연구소로 승격되고, 교육부로부터 매년 지원을 받아 ‘규장각자료를 이용한 연구사업’이 추진된 것은 국사학 발전을 크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구성과는 매년 연구소에서 간행하는《한국문화》에 게재되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1989년 이후부터 해방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 한국현대사 강의가 개설되었다. 그 결과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를 주제로 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이 다수 배출되고 있으며, 이 방면의 연구가 크게 활성화하였다.
2001년부터 대학 입학제도가 다시 바뀌어 학과별 신입생 모집이 폐지되고 인문대학은 역사․철학 계열 7개 학과 신입생을 통합 모집했다. 2002, 2003학년도에는 인문대 전체 15개 학과 신입생을 통합 모집하였고, 2004학년도부터는 인문계열2(역사․철학계열)로 통합 모집하였다. 그 결과 국사학과는 3․4학년 이상의 학생만을 지도하여, 학과 운영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8학번부터는 2학년 전공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고, 2009학년도부터는 국사학과에 2․3․4학년 이상의 학생들이 재학하였다. 인문대학 입학제도는 2013년에 다시 변화하여, 신입생 중 일부는 전공예약 형태로, 나머지 일부는 기존과 같이 인문계열로 통합 모집하였다. 그 결과 2013학년도부터는 다시 국사학과에 10∼13명의 1학년 신입생이 입학하게 되었으며, 인문계열로 통합 모집한 학생들도 2학년부터 전공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2002년에는 최승희 교수, 2003년에는 한영우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이상찬(李相燦; 한국근대사) 교수, 정용욱(鄭容郁; 한국현대사) 교수가, 2005년에는 문중양(文重亮; 과학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2007년에는 정옥자 교수, 2008년에는 최병헌 교수, 2009년에는 이태진 교수가 차례로 정년퇴임하고, 2009년에 남동신(南東信; 한국불교사) 교수, Milan Hejtmanek(한국근세사) 교수, 오수창(吳洙彰; 조선정치사) 교수, 김건태(金建泰; 조선농업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이어 2014년 노태돈 교수, 2015년 권태억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권오영(權五榮; 한국고대사) 교수, 허수(許洙; 한국근대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2017년에는 노명호 교수, 김인걸 교수, Milan Hejtmanek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2018년에 김경숙(金景淑; 한국근세사) 교수, John P. DiMoia(의학사) 교수, 정요근(鄭枖根; 한국중세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2019년에는 이상찬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2020년에는 고태우(高泰雨; 한국근대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2021년에는 송기호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이동원(李東遠; 한국현대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5) 역사학부 한국사학전공 및 대학원 국사학과
―2023-현재―
1969년 사학과의 분할로 성립한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는 지난 50여 년간 한국 사회 및 서울대학교의 성장・발전에 발맞추어 각각의 교육・연구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대학 안팎의 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삼사과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세 학과가 나누어진 체제로는 전통적 분과 학문의 경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학문 분야가 총생하는 시대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 안팎의 현실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아 통합 논의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 위기의식의 심화와 현실 여건의 변화, 인문대학 여러 학과(부)와 학장단, 그리고 대학본부와 입학본부 등의 지지와 도움에 힘입어 통합이라는 숙원을 실현하게 되었다. 2023학년도부터 역사학부 신설을 통해 학부과정이 통합되었다.
23학번부터는 역사학부로 신입생 28명을 선발하였다. 역사학부 학생들은 1년 간 다양한 수업을 접하며 적성과 진로를 탐색해보다가, 전공 배정 전형을 거쳐 한국사학전공, 동양사학전공, 서양사학전공 중 하나의 전공을 선택하게 된다. 인문 광역으로 입학한 학생들 역시 이수학기와 학점 수를 충족시키면 역사학부 한국사학전공, 동양사학전공, 서양사학전공에 지원할 수 있다. 역사학부 체제에서는 이전과 비교하여 한국사학전공이라고 하더라도 공통교과목과 타 전공 교과목을 많이 이수하도록 권장하여, 폭넓은 시야에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젠더사, 환경사, 디지털인문학 등 최근 각광받고 있는 분야들을 다루는 교과목들이 늘어났다.
한편 대학원은 2023년 이전의 국사학과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교수들은 대학원 국사학과 소속으로 역사학부를 겸임하게 되었다. 역사학부 출범 이후 2023년에는 오수창 교수가 정년퇴임하였고, 박성현(朴省炫; 한국고대사) 교수가 임용되었다.
6) 과제와 전망
사학과 및 국사학과 졸업생은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여 주요한 위치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다. 학계로 진출한 졸업생들은 우리나라 한국사학계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2023년 2월 말 기준으로 국사학과 대학원에는 석사과정 20명, 박사과정 22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그동안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원은 217명, 석사학위 취득자는 395명을 헤아린다. 석사학위논문이 중심이 된《한국사론》은 2024년 2월 말 현재 69집(2023년 9월)까지 간행되어, 국내외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학계 다음으로는 언론계와 출판계 진출이 활발하다. 국내 유수의 방송사와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에는 본과 졸업생이 활약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졸업생도 많으며, 일반 기업체에 진출한 졸업생도 많다.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덕분에 학계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부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더욱 폭넓은 시야를 갖고 학계와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졸업생들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국사학과는 우리나라 국사학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앞으로는 세계 각지의 한국학 연구자와 교류를 증진하여 한국학 연구를 진흥시킬 큰 책임을 안고 있다. 남북관계의 개선과 통일운동에 도움이 되는 교류와 민족 동질성 회복에 기여할 책임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그동안의 성과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적극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할 전환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