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사무라이의 ‘士化’ - 메이지유신을 다시 본다

회차 24
발표자 박훈
일자 2015.5.1.
작성자
koreanhistory
작성일
2019-12-17
조회
650

- 주   제 : 사무라이의 '士化' - 메이지유신을 다시 본다


- 발표자 : 박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 시   간 : 2015년 5월 1일(금) 오후 4시 ~ 6시


- 장   소 : 신양인문학술정보관 세미나4실(4동 301호)


 


발표요지


메이지유신사는 그동안 유럽중심주의, 혹은 근대주의적 시각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다.‘서양의 충격을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훌륭한 설명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적어도 19세기전반, 중반의 일본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다른 중요한 흐름이 발견된다. 바로 ‘유교적 영향’의 확대이다. 이것은 막말유신정치사를 ‘동아시아적’관점에서 재해석해야할 필요를 제기한다.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전반에 걸쳐 일본에서는 학교, 연구모임, 사설 학습기관 등이 급증하는데, 이를 배경으로 사무라이사회에 유학학습열이 고조된다. 유교학습에 의해,‘병영국가’체제에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중하급사무라이들이 점점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된다. 필자는 이 현상을 사무라이들이 사대부화되어 간다는 의미에서 ‘士化’라고 지칭했다.
일반 사무라이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상서, 학적 네트워크, 당파 등 중국이나 조선의 사대부들의 정치활동에서 흔히 보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를 필자는 ‘사대부적 정치문화’라고 개념화했는데, 이것은 송대중국에서 탄생하여 명대중국, 조선의 정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었다. 이것이 놀랍게도 병영국가인 19세기 토쿠가와 일본에서 출현한 것이다.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병영국가의 군인이자 胥吏들인 일반사무라이를 정치화시켜 막번체제를 동요시켰던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士化’되어가는 사무라이들의 ‘사대부적 정치문화’에 기반한 정치행동으로 촉발된 것이며, 이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특히 廢藩置縣 이후 급속히 서양화로 대체되어 가지만, 거기에도 적지 않은 흔적과 영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