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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는 왜 사용되었나? -조선 후기 영·정조 대의 우량 측정과 그 정치적, 이념적 맥락

회차 20
발표자 임종태
일자 2014.9.5.
작성자
koreanhistory
작성일
2019-12-17
조회
420

- 주  제 : 측우기는 왜 사용되었나? 
           - 조선 후기 영•정조 대의 우량 측정과 그 정치적, 이념적 맥락


- 발표자 : 임종태 (서울대학교 화학부 교수)


- 시  간 : 2014년 9월 5일(금) 오후 4시 ~ 6시


- 장  소 : 신양인문학술정보관 세미나4실(4동 301호)


 


발표요지


測雨器라는 표준화된 관측 기구를 이용한 조선의 우량 측정 및 보고 시스템은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 자연 현상의 측정이 어떤 동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례이다. 이 발표에서는 世宗의 측우기 제도를 복원한 英祖, 이를 확대 강화한 正祖 대에 초점을 맞추어, 측우기를 이용한 우량 측정 및 그 관측치가 당시의 정치와 행정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降雨에 관한 조정의 관심이 집중적으로 표출된 農政과 祈雨祭의 상황(그 중에서도 1782년 正祖가 거행한 기우제)을 검토함으로써, 다음 두 가지를 주장하려 한다. (1) 측우기 제도를 부활하고 강화시킨 두 임금의 시도에는 農政에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敬天勤民하는 군주로서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확립하려는 두 임금의 욕망이 반영되었다. (2) 하지만, 降雨 현상을 “객관적” 수치로 측정 • 보고하는 일견 ‘근대적’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권의 취약성, 지방의 농업 상황에 대한 중앙의 無知의 반영이었으며, 1782년 기우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측우기의 “객관성”은 도리어 국왕의 정치적 이해를 훼손할 가능성도 있었다.